벌벗 한국사 71화 - 일제에 맞선 불꽃 청년! 독립운동가 박열
힘든 일제강점기를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최선의 다해 길을 개척해 나가는 박열의 이야기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에 북한으로 끌려갔기에,
그 업적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박열~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청년의 독립운동기
호기심과 학구열이 강한 박열은 신식 교육을 받기 원했으나,
그가 학교에서 경험한 것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이였다.
꿈을 갇고 문경에서 경성으로 올라온 박열
선생님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입학을 했지만,
그 당시는 3.1운동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체포의 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다시 고향인 문경으로 내려간 박연은...
일본으로 건너가 적의 심장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무정부주의자의 모임인 흑도회를 조직하여
권력이 자신을 짓밟아도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개새끼'라는 시를 발행한다.
의열단과 접속하여 폭탄을 들여오려 애쓰고,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일본 경찰의 눈에 띄게 된 박열
일본의 황태자를 시해 하기 위해 노력하다. 거사 전 체포!
또 그 때 다시 일본의 그 유명한 관동대지진이 일어난다.
왠지 그의 뜻 대로 운이 따라주지 않는 느낌이다.
이 혼란의 시기,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 정부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탓다는 소문을 퍼지며 유언비어를 퍼뜨려
마을의 자경단을 결성하라는 공문을 보냈고,
수천의 조선인을 학살하였다.
발음하기 어려운 일본어를 하지 못하면, 즉시 살해
확인된 사상자만 6천여명이지만 그 수가 만명은 넘을 걸로 추정되고 있다.
박열은 비록 거사를 성사시키기 전 체포 되었지만,
그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 먹는다.
일본 정부는 박열의 조건을 들어주기로 한다.
후미코와 커플 사진을 찍고, 옥중 결혼을 하게 해주는 등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합니다.
결국 박열은 사형선고를 받지만, 그는 기뻐합니다.
그러나 천황의 사면을 하고, 그에 그들은 분노합니다.
결국 후미코는 감옥에서 자살하고, 박열은 해방이 된 후에도 22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됩니다.
22년 만에 살아 돌아온 박열을 보기 위해 형무소 근처에 모여든 15,000여명의 사람들
일본 정부의 압박에 전향한 사람들
그러나 박열은 전향하지 않았다.
22년동안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살고 있었다.
그는 그 이후 일본 땅에서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찾아온다.
그러나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난다.
북한은 많은 독립운동가와 지식인을 납치하여 북한에 끌려가는데,
박열도 역시 끌려가고 만다.
아나키스트에 납북되었기에 잊혀져야만 했던 독립운동가 박열..